학사검전
학사검전
휘익
파악
누가 자네더러 이따위 주제넘는 보고서를 올리라고 했나?
무림사에 대한 고찰?
자네의 생각이나 의견 따위를 감히 누구더러 들으라고 하는 건가?
지고하신 황태자 전하께 말인가?
자네의 관점따위 누구도 관심 없네.
황태자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살아 있는 무림의 모습일세.
다시 하게.
탁
쯧!
젊은 나이에 전시에 장원 급제 한 진사 운형이라. 얼마 못 가 그만두겠군.
탁
높고 두터운 성벽과 깊은 해자가 사방을 두르고
황금빛 이중 지붕의 궁과 전이 거대한 대칭 구조를 이루는 장엄한 성.
천하의 모든 부귀가 모여드는 대륙의 심장, 자금성.
...에 오기 위해 수많은 주석과 경전 등 43만 넘는 글자를 달달 외우고
다섯 번의 과거 시험을 거쳐 겨우 진사가 되었거늘...
처음 받은 황태자 전하의 지시가 겨우 무림에 대한 연구 조사라니...
하아..
소림이니, 무당이니 하는 것들은 다 뭐람!
황태자 전하의 개인 서고에 있는 '자료'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형편없는 것들이고...
엉터리 같은 내용뿐에, 깊이 있는 견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데 그게 자료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떠도는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통찰하고,
실현 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하기까지 하는 데다 얇기까지 한 내 보고서를 반려하다니!
좋아! 다시 써주면 될 거 아냐!
위풍 당당
나의 비범함을 깨닫게 해주지!!
사흘 뒤
휙
다시 하게.
또 사흘 뒤
다시 하게.
또 또 사흘 뒤
다시!
터덜 터덜
후우...
어찌해야 하나..
탁. 거대한 벽을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네...
황태자 전하 서고의 잡서들로는 도저히 안 되고...
이제 기댈 곳은...
책과 서화의 보고, 문연각.
여기 밖에 없어.
글을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가고 싶어 하는 곳인데...
왜 이렇게 참담한 기분일까.
터덜 터덜
여기에는 황태자 전하의 취향을 만족시킬 단서가 있을까?
만약 이대로 파면당하면 어쩌지..?
광주에 있는 숙부의 일을 도우러 가야 하나?
어머나, 운현 진사님 아니시온지요오?
아,, 자네는...
일전에 진사님을 창룡전으로 안내했었습지요, 니예.
이렇게 뵙게 되니 반가운 마음에 그만 무례를 범했사와요오.
아, 아닐세
무례는 무슨.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자네 이름도 모르고 있었군.
니예, 소인의 이름은 '규'라고 하옵니다.
성은 '박'씨를 쓰고 있지요.
아아.박 환관이군.
자네는 이곳에 웬일인가?
니예, 소인이 모시는 분께서 서책을 찾으셔서 이렇게 걸음했습니다.
진사님께서 이곳 황성 내에 거하시게 되었다 들었습니만 지내시기는 어떠하신지요?
...그저 황태자 전하의 성은에 감읍할 따름이지.
나는 잘 지내고 있네.
추우욱
(아닌 거 같은데....)
잘 지내신다니 다행이군요, 니예.
바쁘신 걸음을 붙잡아 죄송하옵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이..보게! 잠깐만!
니예?
음...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무림의 이야기들이지요.
그것도 아주 흥미진진한.
이를테면 고수들의 비무 같은 것이랍니다, 니예
예전에 황궁을 방문했던 무림 고수의 이야기에 흠뻑 빠지셨으니까요.
끄적 끄적
그때부터 무림에 대한 여러 기록이나 서책들을 구하신 것 같긴 하지만 호호호.
황실 기록인 것이 재미가 있기나 한가요. 온통 딱딱하고 번잡한 이야기들뿐이니 말이옵니다.
그래서 황태자 전하께선 학사가 필요하셨던 것이지요.
그분의 뜻에 따라 황실에 있는 기록을 흥미롭게 재구성하여 정리해줄...
멈칫
(어라? 표정이 굳어 버렸네?)
....그런 명석하고 충성스러운 학사님 말입니다.
그러니 아마도 그쪽으로 학문의 방향을 잡으시면 그리 많이 어긋나지는 않을 테지요. 니예.
그럼 저는 이만...
.....
어쩐지 처음부터 뭔가 아니다 싶었어.
터덜 터널
내가 출근하는 '창룡전'도 내정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고
그 전각에서 근무하는 학사도 사일천 나리와 나뿐이니.
터덜 터널
황태자 전하께 내 실력을 인정받고 싶어 열을 올렸건만...
황태자 전하의 취미 전담 학사라는 게 내 진짜 직책이었다니...
허허허.
문득, 권학가의 한 구절이 귓가를 스쳤다.
"글 속에 천 석의 쌀이 있고,
글 속에 황금의 집이 있으며
글 속에 아리따운 여자가 있다."
글 속에 황금의 집이 있긴 있었는데...
그게 남의 집일 중이야
한 달 후
하하...
문연각에서 내가 열람할 수 있는 잡서만 37,000권...
지난 한 달간 제목을 확인하고 넘긴 책이 대략 1,000권쯤..?
36,000권에서 1/100이 무림에 대한 책이라고 해도 360권..
하루에 한 권 읽는다면 꼬박 일 년이 걸리는 양..
하루에 한 권을 읽을 수나 있으면 다행이지.
한 달 걸려서 찾아낸 게 겨우 열일곱 권
그중에 읽은 건 아홉 권뿐.
이대로라면 읽는 데 삼 년이 걸리겠군.
아니, 읽기만 하면 뭐 해 이해가 안 되는데!!
게다가 이해한다고 끝이냐?
황태자 전하가 마음에 들어 할 정도의 이야기로 바꾸어내야 된다고!!!
쿵 쿵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막막해지잖아, 이거!!!
후우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지!
벌떡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더 있어.
하아아아압
제오식
하아아압
하아.핫.하
이...이거 생각보다 말 붙이기 어렵겠는걸?
수염이 가득한 저 사내가 훈련 교관인가.??
무신 일이시오?
화들짝
으헉!!!
허둥 지둥
허어, 참. 이거 놀라게 할 생각을 없었소만...
괜찮으시오?
아...
괘..괜찮소이다.
.....
텁
!
벌떡
!!!!!
허어... 방금 어떻게 된 거지?
엄청난 괴력을 가진 자로는 보이지 않건만 날 이리도 가볍게 들어 올리다니,
보아하니 문관이신 거 같은데 이곳에는 어인 일이시오?
아, 나는 창룡전의 학사 운현이라 하오.
사실은 무공에 대해 좀 물어볼까 해서..
무공?
특별히 무공이 필요한 곳이라도 있소?
천하에 자금성 학사를 건드릴 간 큰 자는 없을 터인데.
아, 그런게 아니오.
내가 어디 쓰지는 게 아니고..
교두님을 뵙습니다!!
교두님을 뵙습니다!!
훈련을 계속하도록.
뭐...뭔가 높은 사람인 모양이네.
소개가 늦었소.
나는 금군 교두 '일충현'이라 하오.
나.. 나는 창룡전 소속의 학사..
소개는 들었으니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겠소?
아! 그.. 그러도록 합시다.
운 학사의 사정이 그러했구려.
.....
학사가 금군 교두에게 무공을 가르쳐달라고 해도 되는 걸까?
내가 이자의 자존심을 건드린 거라면 어떡하지?
... 운 학사처럼 황실에 속한 몸이오.
게다가 사정을 다 들은 지금 모른 척한다는 것은 사내대장부로서 할 일도 아니고.
그럼..
아무래도 운 학사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을 것 같소.
가... 감사하오! 일 교두!
벌떡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소.
!
무..문제라니.. 어떤...?
나는 금군 교두요.
무공에 대해 가르치는 방법을 단 하나밖에 알지 못하오.
운 학사께서 무공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직접 배우는 수밖에 없소.
쿵
하...하지만 나는 그저 무공에 대한 것을 조금..
나는 금군 교두이지 이야기꾼은 아니오.
황궁 십팔반 무공을 말로 표현할 재주 같은 것은 없소.
그렇다고 금군 교두가 광대 노릇을 할 순 없지 않겠소?
그..그렇지요.
알고 싶다면 직접 배우라는 것인가?
풀썩
하아...
무공을 배우는 것이 부끄러우시오?
그럴리가 있겠소?
금군 교두께서 직접 수고해 주시는데..
내가 오전에 따로 시간을 낼 터이니 학사께서는 내일부터 이곳으로 나오시오.
다른 사람에 대한 걱정은 안 하셔도 좋소.
고맙소, 정말 고맙소,
내 꼭 그러하리다.
당장은 단서도 없으니 무공을 배우겠다 하지만 그래 봤자 학사.
어차피 제풀에 지쳐 오래가지는 못할 테지.
그럼 이만.
넙죽
살펴 가시오.
휘유...
학사가 이젠 무공까지 배워야 하는 신세라니..
추욱~
그냥 계속 책하고 씨름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아냐.
어쨌든 나는 황태자 전하의 학사가 아닌가?
무공을 직접 배워서라도 훌륭하게 일을 완수하여 전하의 인정을 받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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